3~4세 때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도 글 읽는 소리를 매우 좋아했다. 하루는 그의 행방이 없어졌다. 깜짝 놀란 부모는 집 안팎을 샅샅이 뒤졌으나 간곳을 알 수 없었다. 저녁이 되자 돌아왔는데 그를 보고 부모님이 “너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무엇을 했으냐?”고 물으니 “서당에서 글 읽는 소리가 좋아 종일 듣고 있었다”라고 했다.
또 5세 때에 사략(史略)을 두어 달 만에 깨우쳤다. 7세 때에는 어른들이 ‘부(父)’를 넣어 글을 지으라 하니 「훨훨 나는 가지 위의 까마귀, 어머니만 알지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구나(翩翩枝上烏 知母不知父)」라고 지어 모두가 크게 놀랐다.
장성해서도 열심히 글공부에 매진하였는데, 글짓기를 무척 좋아하고, 잘했다. 한(漢), 당(唐), 송(宋) 이래의 대 문장가들의 글을 외우는 것을 기본으로 하면서 특히 한유의 문장을 제일 좋아했다.
한번은 고을 현령이 공의 학행(學行)이 높다는 소식을 듣고서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던 적이 있었다. 이때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고대(古代)것이 아닌데다가 시원찮다고 여겨 그 자리에서 악부(樂賦)를 지어 내어 놓으니 그 훌륭한 문장력에 모두들 탄복했다.
젊은 시절 화장산(華藏山) 초당에서 독서에 몰두하여 30세 전후에 경전(經典)과 천문지리(天文地理), 의술(醫術) 등 두루 통달(通達)하였다. 이후 호문(湖門)에서 도학(道學)을 연마하였으며 출사(出仕)에 뜻을 끊고 오직 경(敬)하나로 거경궁리(居敬窮理)하였다.
집안의 이력
아주(鵝洲) 신씨(申氏)의 시조는 고려 때 권지호장(權知戶長)을 지낸 영미(英美)이다. 대표적 인물은 우(祐)인데, 그는 충혜왕 때 전라도 안렴사(按廉使)를 지냈으며, 지극한 효자로서 경상북도 의성(義城)에 정문과 효자비가 세워졌다.
조선시대에 크게 벼슬을 한 사람은 없으나 학자와 효행으로 이름난 사람이 많다. 우의 6대손 원록(元祿)은 성리학을 연구한 학자로서 효행이 뛰어나 효자정문이 세워졌고, 그의 손자 3형제 중 적도(適道)는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찰방(察訪)을 지냈는데, 역시 학문과 효행이 뛰어났다.
달도(達道)는 삼사(三司)를 역임하고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정묘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열도(悅道)는 직언(直言)으로 유명하고 병자호란 때 역시 척화를 주장했으며, 장령을 거쳐 능주(綾州)목사를 지냈다. 또 우의 9대손 지제(之悌)는 임진왜란 때 예안(禮安)현감으로 용인(龍仁)싸움에 참전하여 선무(宣武)·호종(扈從)의 두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그의 아들 홍망(弘望)은 대간·수령·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공의 휘는 체인(體仁)이며 자는 자장(子長), 호는 회병(晦屛)이다. 시조인 휘 영미(英美)의 20세손이고, 현조(顯祖)인 휘 지제(之悌)의 7세손이다. 영조(英祖) 7년 신해(辛亥) 4월 25일에 의성현(義城縣) 서쪽 구미동(龜尾洞)에서 태어났다.
지극한 효성과 우애 있는 행실
8세라는 어린 나이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울부짖고 곡하는 것을 마치 어른같이 하였을 뿐만 아니라 형제들과 돈독하게 지냈다. 임술(壬戌) 년에 계모(繼母)가 들어왔는데 처음에는 숨어서 낯을 가리며 울었기에 보는 이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1년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계모마저 운명하니 친자식처럼 슬피 울어 자식의 효를 다했다.
안타까운 자식
그에게는 아들이 4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으나 둘은 일찍 죽었다. 맏아들 정진(鼎辰)은 진사였는데 선생보다 일찍 죽었다. 죽은 아들이 평소에 예를 좋아했다고 하여 죽은 후에 어른 장사를 지냈다.
스승, 배움 이야기
그가 34세 때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 문하에 들어갔는데 강와(剛窩) 임필대(任必大)선생과 구사(九思) 김낙행(金樂行)선생에게 배운 학문의 경지가 높은 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대산(大山) 문하에 들어간 지 18년 만에 대산 선생이 돌아가셨기에 문하 동문 선배들과 같이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강론을 하며 스승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도학에 심취하여 벗을 얻음
이 시기에 여기서 도학(道學)으로 학문을 전향했는데, 내면을 닦고 강직하며 명확함과 용기 있음에 칭찬을 받았다.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강론을 하며 사귄 이가 이종수(李宗洙), 김도원(金道源), 류장원(柳長源), 김종덕(金宗德), 정종로(鄭宗魯), 남한조(南漢朝), 김광(金壙), 류도원(柳道源), 조성소(趙聖紹), 정창백(鄭昌伯) 등인데, 이들과 교유하면서 도학에 심취하였다.
이듬해 향리에 돌아와 금연정사(錦淵精舍)를 짓고 집 이름을 왼쪽에는 주경(主敬), 오른쪽에는 집의(集義)라 쓰고 시와 기문을 스스로 지었다.
외사잡기(外史雜記), 천문지리(天文地理), 복서의약(卜筮醫藥)을 다 연구했다. 중년이후 주리서(主理書)를 주장하여 수백 권의 잡서를 다 치우고 정주학(程朱學)에 몰두했다. 앉아서 사물(四勿)과 장자육유(六有)와 심근요어(心近要語)를 사벽에 걸어 놓고, 병풍을 만드는데 퇴계선생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만들어 좌우에 둘러놓고 있었다.
숭경록(崇敬錄)은 요순이래의 중국 및 우리나라의 고금(古今)에 걸친 도학(道學) 현사들의 경(敬)에 대한 주장과 이론을 수집해서 체계있게 정리하고 자신의 사상도 가미한 논문이다. 도학자들이 그토록 숭상하고 지켜온 경에 대한 저술로는 숭경록만한 책이 흔치 않다. 이것은 80 평생을 초야에 묻혀 선혈의 심법(心法)과 제자백가서를 달통한 공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천학종지도변(天學宗旨圖辨)
『천학종지도변』은 천주교에 대한 비판서이다. 신체인은 근래 중국을 통해 들어온 천주학에 기호지역의 총명한 인재들이 대거 중독되었다고 적고 있다. 분량도 상당히 방대한 편이며, 저자의 서학비판에 관련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난리일기서(亂離日記序)
『난리일기서』는 유유헌(由由軒) 남급(南礏) 쓴 『난리일기』에 대한 서문이다. 저자가 병산에 갔다가 비로 인하여 귀가하지 못하고, 유유헌의 증손인 남주서의 집에서 『난리일기』를 구해보고 쓴 서문이다. 『난리일기』는 병자호란 때의 일기로서 당시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일어났던 일을 적었다.
독서류록(讀書謬錄)
『독서류록』은 신체인이 독서를 하면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을 발췌하고 자신의 생각을 적은 독서록이다.『대학(大學)』‧『소학(小學)』‧『심경(心經)』‧『가례(家禮)』등에서 뽑은 내용들이 많다. 또 역사서와 주요 학자들의 일화나 주장도 언급했다. 분량이 많고 논의도 심오하다.
회병집(晦屛集)
『회병집』은 의성지방의 처사 신체인(申體仁)이 지은 시문집이다. 목판본으로 12권 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1은 시 220수로 구성되어 있고, 권 2~5는 서(書) 119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상정(李象靖)·김종덕(金宗德)·류장원(柳長源)·채제공(蔡濟恭)·이의태(李宜泰) 등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들과 주고받은 서신과 자제와 조카들에게 보낸 편지들이 주류를 이룬다. 권 6은 잡저 10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천주교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져 있는 「천학종지도변(天學宗旨圖辨)」이 눈에 띄고, 또한 「중하상부재리면변(中何嘗不在裏面辨)」 등이 대표적이다. 권 7은 난리일기서(亂離日記序), 귀동일고서(龜洞逸稿序)등의 서(序) 9편과 삼수헌기(三守軒記), 낙소재기(樂素齋記) 등의 기(記) 1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8은 제망금강도장자축면(題望金剛圖障子軸面), 장달산실적권후발(張達山實蹟卷後跋), 남계실기발(南溪實紀跋) 등의 식발(識跋) 12편과 잠명(箴銘) 4편, 상량문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9는 제문 21편, 묘표 2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권 10은 묘지명 12편, 묘갈명 3편, 비문 2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 11은 행장 9편, 전(傳) 1편, 권 12는 부록인 행장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